스기야마 시게마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후쿠오카 번 출신의 일본 제국 시기 인물로, 겐요샤 활동, 일본흥업은행 설립 운동, 대만 통치 참여, 러일 전쟁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하고, 겐요샤에서 활동하며, 홍콩 무역을 통해 경제 지식을 쌓았다. 일본흥업은행 설립을 추진했으나 실패했으며, 대만에서 제당 산업 진흥에 기여했다. 러일 전쟁에서 고다마 겐타로와 협력하여 전쟁을 지원하고, 만주 경영에 참여했다. 한일 병합에 관여하고, 하카타 항 축항과 관문 터널 건설을 추진했다. 스기야마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학, 예술,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스기야마 시게마루 | |
---|---|
기본 정보 | |
![]() | |
통칭 | 其日庵(그날암) |
출생 | 1864년 9월 15일 |
출생지 | 후쿠오카 |
사망 | 1935년 7월 19일 |
사망지 | 도쿄 |
묘소 | 일행사 (후쿠오카시) |
사상 | |
사상 | 아시아주의 |
활동 | |
조직 | 현양사 |
기타 | |
투옥 | 1889년 |
영향을 받은 인물 | 도야마 미쓰루 |
각주 | "百魔" 출판 당시의 스기야마 시게마루 꿈노 규사쿠와의 합작? |
2. 생애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후쿠오카 번사 출신으로, 어린 시절 빈곤한 생활을 했다. 1880년 17세에 도쿄로 가서 야마오카 테츠주의 문하생이 되었고, 고토 쇼지로, 오이 켄타로 등과 교류했다. 1885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설득당했다.[4]
1887년 겐요샤에 합류하여 경제 기반 확립에 힘썼고, 지쿠호탄다 취득을 건의했다.[5] 겐요샤 기관지 『후쿠료 신포(福陵新報)』(후에 규슈 일보를 거쳐, 후쿠오카 니치니치 신문과 합병하여 현재의 니시니혼 신문) 창간에도 관여했다.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습격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85일간 수감되기도 했다.[7]
1892년 제1차 마쓰가타 내각의 선거 개입 당시 민당 탄압에 협력했으나,[8] 이후 겐요샤를 떠나 홍콩과 석탄 무역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경제 지식을 쌓고 국가 경제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사업은 실패했다.[8]
1894년 가네코 겐타로와 함께 일본흥업은행 설립 운동을 시작했고, 1897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산업 현황을 시찰하고 야하타 제철소 설립에 기여했다. 1898년 다시 미국에 가서 J. P. 모건과 차관을 약정했으나, 국내 반대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고다마 겐타로의 타이완 총독 취임 후, 제당 산업 진흥을 건의하고 타이완은행 설립 및 타이완 종단 철도 건설에도 관여했다.[9] 1900년 이토 히로부미의 헌법정우회 창설 자금 일부를 제공했다.[9]
1901년부터 가쓰라 다로, 고다마 겐타로와 함께 러일 전쟁 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902년 영일 동맹 체결과 1903년 이토 히로부미의 추밀원 의장 취임에 영향을 미쳤다.[1][2][3] 1905년 봉천 전투 이후 고다마에게 밀사를 보내 강화를 건의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수행하여 만주로 건너가 전후 만주 경영책을 기획했다.[4][5]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설립에도 기여했다.[3]
1906년 대한제국 통감부 개청 후, 이토 히로부미에게 내다 요헤이를 추천하여 일진회의 일한 합방 운동을 지원하게 했다.[10] 스기야마는 일진회의 고문이 되었으나, 1921년 구 일진회 회원들로부터 자결을 요구받았다.[10]
1912년 하카타항 축항을 기획하고, 관문터널 건설을 민간 주도로 추진했으나 정부 사업으로 결정되어 무산되었다.[11] 1919년에는 규슈~쓰시마~조선 해저 철도 터널 안을 정부에 건의했다.[11]
2. 1. 초기 생애 (1864년 ~ 1887년)
후쿠오카 번사 출신 아버지 스기야마 노부타네(杉山信胤, 스기야마 사부로헤이(杉山三郎平)라고도 불림)[3]와 어머니 시게키(重喜)의 장남으로 후쿠오카 성하 이나바정 오오요코초(因幡町大横丁)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원년(1868년) 11월, 스기야마 사부로헤이가 번주 쿠로다 나가토모(黒田長知)에게 번적 봉환을 직언하여 징계를 받았다. 메이지 2년(1869년), 아버지의 징계가 해제된 후 귀농을 원하여 온가가와(遠賀川) 하구의 아시야촌(芦屋村)으로 이주했으나, 사족 가문이 경영하는 농업은 순조롭지 못하여 빈곤한 생활을 보냈다. 이후 치쿠시군(筑紫郡) 야마야(山家)와 아사쿠라군(朝倉郡) 요스촌(夜須村) 등을 전전했다. 메이지 5년(1872년) 7월 6일, 어머니 시게키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메이지 11년(1878년), 아버지 사부로헤이는 치쿠젠정(筑前町)에 경지의숙(敬止義塾)을 열고 사서오경을 가르쳤다.메이지 13년(1880년) 9월, 17세의 나이로 처음 도쿄에 가 야마오카 테츠주(山岡鉄舟)의 문하생이 되었고,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및 오이 켄타로(大井憲太郎) 등과 교분을 맺었다. 1년 반 동안 도쿄에 머문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메이지 17년(1884년) 여름 구마모토를 방문하여 사사 토무사(佐々友房)를 만나 "정권을 장악한 범벌의 수장을 타격한다"고 서로 맹세했다. 같은 해 다시 도쿄로 상경했다. 메이지 18년(1885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폭정의 근원이자 탈아입구와 범벌의 거두로 여기고 암살을 기도, 야마오카 테츠주(山岡鉄舟)의 소개장[4]을 가지고 면회에 성공했지만, 오히려 서로 자중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일하자고 설득당했고,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숙소로 돌아갔다.
2. 2. 겐요샤 시대 (1887년 ~ 1892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한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관헌의 추적을 피해 홋카이도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1887년 구마모토현 출신인 야에노 하나사부로의 소개로 같은 고향 출신인 가시라야마 미쓰루를 만나[5] 그에게 감복하여 이후 함께 행동하였다.[6] 가시라야마 미쓰루와 함께 후쿠오카로 돌아온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겐요샤(현양사)의 경제 기반 확립을 위해 가시라야마 미쓰루에게 지쿠호탄다(筑豊炭田) 취득을 권유하고,[5] 스스로 자금 조달에 분주히 다녔다. 그를 위해 당시 원로원 의관이었던 안바 야스카즈를 후쿠오카현 지사로 취임시켰다. 1888년 호토리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나카에 조민을 만났다.[6]
겐요샤(현양사) 기관지 『후쿠료 신포(福陵新報)』(후에 규슈 일보(九州日報)를 거쳐, 후쿠오카 니치니치 신문(福岡日日新聞)과 합병하여 현재의 니시니혼 신문(西日本新聞)) 창간 등에도 관여하였으며, 유키 고고로와 함께 "가시라야마 미쓰루의 두 팔"이라고 불렸다. 1889년, 겐요샤(현양사) 회원인 기지마 쓰네요시에 의한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고, 스기야마 시게마루도 많은 겐요샤(현양사) 회원들과 함께 용의자로 지목되어 85일간 수감되었다.[7]
2. 3. 홍콩 무역과 일본흥업은행 설립 운동 (1892년 ~ 1900년)
1892년(메이지 25년), 제1차 마쓰가타 내각의 유혈 선거 개입 사건 당시,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도야마 미쓰루의 지시에 따라 민당 탄압에 협력했다.[8] 그러나 도야마가 마쓰가타의 변절에 분노하여 정계와의 관계를 끊었을 무렵, 스기야마 또한 겐요샤를 떠났다. 이 무렵부터 스기야마는 홍콩과 석탄 무역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 현지에 방문했다. 스기야마는 홍콩 무역을 통해 경제 지식을 축적하고, 동시에 서구 열강의 중국 경제 지배 양상을 직접 목격하면서 국가 경제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역 사업 자체는 실패했고, 스기야마는 아내와 자식을 후쿠오카에 남겨둔 채 도쿄로 상경했다.[8]1894년(메이지 27년),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같은 고향 출신의 선배인 가네코 겐타로와 친분을 맺고 경제 정책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무렵 도쿄 니치니치 신문 주필 아사히나 지센과도 알게 되어 “유쾌한 모임”(暢気倶楽部)이라는 모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고다마 겐타로, 고토 신페이 등과 인맥을 넓혔다. 스기야마는 가네코와 협력하여 산업 자본 공급을 위한 일본흥업은행 설립 운동을 시작했고, 아사히나는 가네코와 스기야마의 동향을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서 보도하며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스기야마는 1897년(메이지 30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산업 현황을 시찰했다. 이때 입수한 자료는 야하타 제철소 설립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1898년(메이지 31년)에 다시 미국에 가서 세계적인 금융 거물인 J. P. 모건과 단독 면담하고 거액의 차관을 약정하는 데 성공했다.
스기야마 등의 일본흥업은행 설립 운동은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이노우에 가오루 재무대신의 이해를 얻었으나, 지조증징 문제를 둘러싼 내각과 의회의 혼란 속에서 무산되었다. 쿠마이타 내각을 거쳐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 의해 1900년(메이지 33년)에 「일본흥업은행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일본 귀족원과 국내 은행가들의 반대로 외자 도입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스기야마가 모건과 체결했던 자본 도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흥업은행의 설립은 스기야마를 허풍쟁이로 여겼던 사람들의 스기야마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2. 4. 타이완 통치와 정우회 창립 지원 (1898년 ~ 1900년)
1898년 고다마 겐타로가 타이완 제4대 총독으로 취임하고, 고토 신페이가 민정장관으로 발탁되자, 스기야마는 고다마 등에게 제당 산업 진흥을 통한 타이완 경제 확립을 건의하고, 스스로도 제당회사 설립에 관여했다. 또한 타이완은행 설립 및 타이완 종단 철도 건설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이며, 소에다 쥬이치, 나카가와 코쥬로 등을 타이완은행 총재로 추천했다.[9] 봉래미 보급에도 힘썼다.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정우회를 결성할 당시,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그 창설 자금 일부를 제공했다.[9] 스기야마는 원래 정당 정치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지만, 장래의 러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이토에 의해 정부 방침을 돕는 정당이 결성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이토에게 제공된 100000JPY의 자금 출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스기야마의 친구였던 오미다 타카요시와 실업가 오카다 하리에무가 유력시되고 있다.[9] 이토 내각 성립 당시, 이토로부터 경시총감 취임을 부탁받았으나 고사했다.
2. 5. 러일 전쟁과 만주 경영 (1901년 ~ 1905년)
스기야마는 창기구락부 등을 통해 육군의 고다마 겐타로와 친밀하게 교류하며 대러시아 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서약했다. 1901년 총리대신이 된 가쓰라 다로도 이 서약에 가담했다. 가쓰라, 고다마, 스기야마 세 사람의 활동은 러일 협상을 주장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902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 중일 때, 가쓰라 내각이 갑작스럽게 영일 동맹을 체결한 것은 이토를 "러일 전쟁 전사 제1호"로 만들려는 스기야마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1] 1903년 7월, 대러시아 전쟁을 준비하는 가쓰라 내각과 대립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고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해야 했던 것은, 스기야마가 가쓰라와 고다마에게 이토의 추대를 제안했기 때문이었다.[2][3]
도쿄 쓰키지혼간지 경내에는 러일 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스기야마가 고다마에게 차솥을 증정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솥" 비가 있다.
1905년 봉천 전투 이후, 고다마 겐타로가 몰래 귀국하여 정부 수뇌부에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스기야마 시게마루가 고다마에게 밀사를 보내 강화를 추진해야 할 시기라는 건의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 여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강화 칙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오야마 이와오 이하 만주군 수뇌부와 회담했는데, 이때 스기야마는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를 수행하여 만주로 건너갔다.[4] 스기야마는 선양에서 고다마 겐타로의 숙소에 함께 머물며 고다마로부터 만주 지리 등의 자료를 받아 전후 만주 경영책을 기획하라는 요청을 받았다.[5] 스기야마는 귀국 후, 반관반민 합동회사인 철도회사 설립을 기획했다. 이 안이 고다마에 의해 채택되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설립되었다.[3]
러일 강화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일본은 캄차카반도 주변의 어업권을 30년 계약으로 획득했는데, 이것 또한 스기야마의 책략에 의한 것이었다.[6]
2. 6. 한일 병합 (1906년 ~ 1910년)
러일전쟁 후, 1906년 (메이지 39년) 대한제국 통감부가 개청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통감이 되었다. 스기야마는 이토에게 한국 방문 시 내다 요헤이를 동행할 것을 권유했고, 이토는 내다를 통감부 촉탁으로 채용했다. 내다는 한국에서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이용구와 송병준과 친분을 맺고 일진회의 일한 합방 운동을 지원했다.[10] 스기야마는 일본 국내에서 내다로부터의 정보를 정부 수뇌부에 전달하고, 내다와 일진회로부터의 여러 가지 요청에 대해 정부와의 교섭 창구가 되었다. 스기야마는 일진회의 부탁으로 고문이 되었다. 일진회가 목표한 것은 일한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병하는 “합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 때문에 1921년(다이쇼 10년) 스기야마는 구 일진회 회원들로부터 자결을 요구받았다.[10]2. 7. 하카타 항 축항과 관문 터널 계획 (1912년 ~ 1935년)
스기야마는 대륙 발전에 이어지는 사업으로 하카타항 축항을 기획했다.[11] 1912년, 스기야마는 유력자들을 모아 하카타항 축항에 대한 협력을 설득했다. 모두가 찬성했고, 당국으로부터 축항 허가를 받았다. 이를 알게 된 스기야마의 절친인 나카무라 조사부로(中村定三郎)는 형인 나카무라 세이시치로(中村精七郎)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나카무라 형제는 축항을 맡아, 세이시치로가 자금 300만엔을 제공하여 1917년에 착공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임금과 물가가 5~6배나 상승했기 때문에, 나카무라는 자금을 모두 소진했고, 축항 사업은 중단되었다.[11]1912년, 스기야마는 관문터널을 민간의 힘으로 건설하고자 출자자를 모집하고 정부에 허가를 신청했으나, "이 공사는 정부 사업으로 진행한다"는 이유로 허가받지 못했다.[11] 스기야마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36년에 관문터널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고,[12] 1944년에 상하행선이 완공되었다.
1919년에는 규슈~쓰시마~조선 해저 철도 터널 안을 정부에 건의했다.[1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친 | 스기야마 사부로헤이(杉山三郎平) | 번교(藩校) 조교 |
남동생 | 하야시 코마오(林駒生) | (1870-1931) 부산의 조선해통어업조합연합회 이사, 대한제국 통감부(韓国統監府) 수산기사 |
남동생 | 류조지 타카쿠니(龍造寺隆邦) | 스기야마 이오에(杉山五百枝) |
전처 | 호토리(ホトリ) | 후쿠오카번(福岡藩) 무사 오시마 요시카타(大島義賢)의 장녀. 여자사범학교 졸업. 가풍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두 살 된 장남을 남겨두고 이혼 후, 후쿠오카 니치니치 신문사의 타카하시 군인(高橋群稲)(소겐(宗硯))과 재혼하여 세 자녀를 둠. |
후처 | 이쿠모(幾茂) | 후쿠오카번(福岡藩) 무사 토다 시치조(戸田七藏)의 장녀[13] |
장남 | 유메노 큐사쿠(夢野久作) | 전처 소생 |
딸 | 미즈에(瑞枝) | 후처 소생. 가네스기 에이고로(金杉英五郎)의 조카 가네스기 신(金杉進)의 아내. |
딸 | 타미코(たみ子) | 후처 소생. 이비인후과 의사 이시이 준지(石井俊次)의 아내. |
4. 평가 및 비판
스기야마 시게마루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 및 비판은 현재까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의 대한제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대한제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
러일전쟁 후 1906년 대한제국 통감부가 개청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통감이 되었다. 스기야마는 이토에게 한국 방문 시 내다 요헤이를 동행할 것을 권유했고, 이토는 내다를 통감부 촉탁으로 채용했다. 내다는 한국에서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이용구와 송병준과 친분을 맺고 일진회의 일한 합방 운동을 지원했다.[10] 스기야마는 일본 국내에서 내다로부터의 정보를 정부 수뇌부에 전달하고, 내다와 일진회로부터의 여러 가지 요청에 대해 정부와의 교섭 창구가 되었다. 스기야마는 일진회의 부탁으로 고문이 되었다. 일진회가 목표한 것은 일한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병하는 “합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가 되었다. 1921년 스기야마는 구 일진회 회원들로부터 자결을 요구받았다.[10] 병합 후 조선에 대한 정부의 시정(施政) 실정을 우려한 스기야마는 1923년 총리대신에게 『건백(建白)』을 보내 조선의 시정 개혁을 강력하게 호소했다.[10]참조
[1]
뉴스
<書物の身の上 出久根達郎>夢野久作との合作?
日本経済新聞社
2019-12-29
[2]
서적
(추정)
1935
[3]
서적
(추정)
1989
[4]
서적
(추정)
1975
[5]
문서
1935년 5월 두산 만·스기야마 시게마루 교우 50주년 기념 "금국 축하회" 개최
[6]
서적
(추정)
1935
[7]
서적
거인 두산 만옹
[8]
서적
(추정)
1935
[9]
서적
(추정)
1975
[10]
서적
이용구소전
[11]
서적
대웅 아사지로군 추도록
1975
[12]
문서
관문 터널 (산요 본선) #직접 연락을 향한 노력
[13]
웹사이트
스기야마 시게마루
https://jahis.law.na[...]
1903-04
[14]
서적
(추정)
2015
[15]
서적
다도 3년
[16]
서적
조부 고가네이 요세이 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